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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야기*

다섯번째 서울 이야기 - 금천구

by 짱짱맘s 2020.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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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인지도가 낮은 금천구




금천구의 집값은 같은 서울 지역인 인근의 구로구와 관악구에 비해서도 낮고, 경기도의 광명시, 안양시 보다도 낮습니다. 그래서인지 금천구 주민들을 만나게 되면 유독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높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금천구 시흥동의 아파트 남서울힐스테이트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잇습니다. 원래 금천구의 랜드마크 단지는 관악산 호압사 아래에 있는 벽산타운이었습니다. 

벽산타운은 5,000세대가 훨씬 넘는, 서울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단지입니다. 관악산 경사지에 지어져, 평지인 시흥사거리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중세 유럽의 거대한 성벽을 보는 듯 착각할 정도로 멋진 단지입니다.

그러나 2012년 시흥동 한양아파트를 재건축한 남서울힐스테이트가 입주를 하면서 금천구의 랜드마크 자리를 물려주게 됩니다. 시세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서 왜 아파트 이름을 굳이 '남서울힐스테이트'라 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일반적인 작명법으로 '시흥동힐스테이트' 내지 '금천힐스테이트'라고 지으면, '아 시흥도에 있구나, 금천구에 있구나'하고 바로 와 닿을 텐데요. 반면 남서울은 너무 광범위해서 그 단어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동산 홍보 측면에서는 매우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서울'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아파트가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던 속내가 은근히 엿보이는 듯합니다.

금천구에서 가장 시세사 높은 아파트이자 가장 최근에 입주한 롯데캐슬골드파크 3개단지의 경우는 아예 지명을 다닞명에 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지명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것이지요.


사례들을 통해 보는 지명 인지도의 중요성


선거철마다 우리는 지자체장들과 국회의원들이 그 지역의 부가가치를 상승시킬 여러공약들을 내세우는 모습을 쉽게 접하게 됩니다. 지역의 부가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추상적이기도 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지명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인데요. 지명 인지도가 높으면, 지명 그 자체가 영향력을 끼치고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는 지역만이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구체적인 결과물로 나타나는데요.

가장 쉬운 예로 분당과 일산을 들 수 있습니다. '난 분당구민이지, 성남시민이 아니야', '난 일산구민이지, 고양시민이 아니야'라는 마음가짐이 지금의 분당과 일산의 이미지와 부가가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목동아파트에 대한 사례도 있습니다. 14단지까지 있는 목동아파트의 과반수가 사실 행정구역상 목동이 아닌 신정동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그래서 양천구가 해당 아파트의 이름을 목동아파트에서 신정아파트로 교체하려 했었는데요. 오히려 해당 주민 대다수의 반대와 항의로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양천구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신목동이라는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목동이라는 지명 그 자체에 대한 인지도와 부가가치가 강해 채택되지 못했고, 결국 현재도 양천구 신정동 내 목동아파트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또 몇 년 전 지번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서초구 반포동 주민들 간에 '반포로'라는 지명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잠원동에 새로 분양하는 모든 아파트들의 이름에 모두 '신반포'라는 지역 브랜드를 붙이는 이유와 같은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지명에 대한 인지도와 부가가치가 부동산 자체의 가치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행궁을 책임지던 길지, 시흥



이런 차원에서 보면 금천구 지역민들은 금천이라는 지명 인지도를 높이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를 해 봅니다. 그러나 이는 지역주민들의 무관심보다는 내세울 만한 구심점을 찾지 못했던 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천구, 특히 시흥에 자부심을 드리고자 관련된 역사적 사건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행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행궁은 쉽게 풀이하자면 왕의 임시 숙박지 입니다. 조선시대의 왕이 다른 지역으로 외출을 하면 그가 머물 곳은 절대 적당히 정하지 않습니다. 숙박이든 잠시 쉬었다 가든 거처든지 간에 사전답사를 통해 왕이 머물 자리를 결정하는 택지를 거쳤습니다. 이 택지 작업은 조선시대 육조 기관 중 예조에서 하였는데, 왕의 예상 동선을 세밀하게 고려하여 그중에서도 풍수적으로 좋은 입지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신중하고 까다롭게 선정된 곳이 바로 행궁입니다.

행궁으로 가장 유명한 왕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였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거의 매년, 능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를 했었습니다. 이런 행차를 그린 행차도를 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여러 번 보셨을 텐데요.

그 행차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오전 일찍 출발해도 오후가 다 되어서야 행차의 마지막 인원이 한양을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던 사대부 세력들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정조는, 일부러 그들이 두려워할 만한 강한 왕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로 행차를 했다고 합니다.

화성까지는 통상 하루를 쉬어서 갔습니다. 지금이야 2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지만,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반드시 숙박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그때 숙박을 위해 쉬어가던 곳이 바로 시흥 행궁이었습니다.

시흥사거리에서 벽산아파트 방향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은행나무사거리가 나오는데, 현재도 남아있는 800년 된 은행나무 터가 예전 행궁을 했던 그 관헌자리입니다.

화성 행차 첫해에는 사당동 쪽의 남태령 고개를 통해 넘어갔지만, 그 길이 왕이 지나기에는 좋지 않아서 그다음 해부터는 현재 시흥동으로 길을 변경했다고 전해집니다. 덕분에 시흥 관헌이 있던 시흥동 지역에 행궁을 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사건이 별 의미 없는 단순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시죠? 과거와 현재는 지속적으로 닮아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으니까요. 실제 이 행궁은 우리나라 국도의 첫 번째 타자, 1번 국도가 탄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길이 이 시대부터 이용이 되었다는 것이죠.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게다가 금천구 시흥동엔 왕궁이 있었습니다. 왕궁터와 왕릉터는 나라에서 가장 좋은 풍수 명다입니다. 1년에 딱 하루를 위한 왕궁이었지만요. 서울 내 다른 구 지역 역사를 찾아봐도 왕궁이 있던 곳은 딱 두 군데, 오직 종로구와 금천구입니다. 결론적으로 시흥은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만큼 좋은 지역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당당하게! 금천구를, 시흥동을 내세우시기 바랍니다.





김학렬의 <수도권 알짜 부동산답사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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